2015년 6월 5일 금요일

일병 일기 2 - 나방 학살


  새벽 다섯 시에 경계를 나갔다. 총기 안전검사를 마치고 탄약고에 도착해 고가초소에 올라가서 부사수 자리에 나방이 많은지 확인했다. 부사수 자리 바로 옆에 외등이 있어서 밤에 나방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아침에도 그런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숫자는 많았지만 야간에 비해 아주 잠잠했다. 밤에는 불빛 주위로 엄청나게 날아다니면서 '혹시라도 나방이 내 얼굴에 달려드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데, 의외로 다섯시 쯤엔 나방들이 전부 초소 방충망, 벽, 바닥에 앉아있었다.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앉아있는 나방이 많아서 싫었고 그 나방들을 살려두면 개체수가 더 많아지고 계속 우리를 짜증나고 역겨운 감정이 들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것들을 죽이고 싶었다. 에프킬라가 있었다면 간편한 방법으로 한꺼번에 나방을 없앨 수 있었을텐데, 아쉽게도 초소에는 그게 없었다. 그래서 난 바닥에 있는 나방은 군홧발로 밟아 죽이고, 벽에 붙은 건 대검을 눕혀서 납작한 부분으로 죽이는 걸 고민했다. 불안한 것은, 한마리씩 죽이다가 나방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갑자기 우르르 나한테 달려들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그래서 일단 무리에서 가장 떨어져있는 나방을 한 마리 꾹 밟아보았다.

  다행히 다른 나방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나는 밟은 나방을 확실히 죽이려고 발을 떼지 않고 바닥에 붙인 채 쭈욱 끌었다. 그렇게 하자, 발을 들었을 때 나방은 확실히 죽어서 으깨져 있었다. 나는 나방들이 거의 혼수상태급으로 자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무리에서 가장 멀리있는 놈이라도 떨어진 거리가 정말 먼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약간 자신감이 붙은 나는 그 징그러운 커다란 까만 눈알과 북실북실한 털, 옛날 TV 안테나같은 더듬이의 모습을 자꾸 떠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한마리씩 차근차근 죽여 나갔다. 거의 다 죽였을 때는 마치 지저분한 방 청소를 조금 한 것처럼 만족감을 느꼈다.

  그렇게 나방을 죽이고 나서, 사수와 수다를 떨다가, 경계도 섰다가 하다보니 시간이 다 되어 교대를 하고 다시 부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가는 도중 외등이 두개나 달려서 나방이 제일 많이 모이는 전봇대 옆을 지나가는데, 그곳 역시 한밤중에 비해 조용해지긴 했으나 나방이 잔뜩 있었다. 묘사하자면 전봇대에 하얀 버섯이 잔뜩 핀 것처럼 나방이 많이 붙어있었고, 전봇대 아래쪽 풀밭에도 나방이 잔뜩 모여있었다. 여기서 생물 교과서에서만 보던 나방의 보호색 효과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의도한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흰 나방들이 토끼풀 군체 근처의 클로버 잎들 위에 있어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곳에 나방이 아니라 토끼풀이 피어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전봇대에 앉은 나방들은 이런 느낌...
N. A. Naseer / www.nilgirimarten.com / naseerart@gmail.com [CC BY-SA 2.5 in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5/in/deed.en)], via Wikimedia Commons


풀 위에 앉은 나방은 이런 느낌...
By Matt Lavin from Bozeman, Montana, USA (Trifolium repens  Uploaded by Tim1357) [CC BY-SA 2.0 (http://creativecommons.org/licenses/by-sa/2.0)], via Wikimedia Commons



  오늘 보고 죽인 나방이 꽤 많은데 앞으로 남은 나방들이 더 커지면 어떻게 경계근무 때 감당할지 모르겠다. 방역차가 대대를 한번 돌면서 다 죽여주었으면 좋겠는데, 아쉽게도 우리한테 그런건 없다.







군대 일기 목차로 가기

댓글 1개:

  1. 윽, 상상하니 너무 징그러~ (><;)
    대검은 잘 닦아 찼는지 궁금하군요..흐흐&

    답글삭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