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4일 금요일

일병 일기 17 - 불모지 첫 날

2015.09.04.금 - 불모지 첫 날
(불모지 지뢰 제거 작전 첫 날)

  근 두달동안 DMZ에 가서 지뢰 제거, 초목제거하는 작전을 하는데 지원해서 드디어 출발하는 날이 왔다. 처음에 가겠다고 한 이유는 지금 되돌아보면 참 어이없는 생각이라고 보이지만, 이랬다. 가장 큰 이유는 '군대에 기왕 온 거, 맨날 훈련, 연습만 하지 말고 실제 상황 한번 겪어보고 싶다'는 거고, 부차적인 이유는 첫째, '내 동기들이 전부 가는데 나도 가면 좋을 것 같다', 둘째, '포상휴가도 주니까 가면 좋을 것 같다'가 있었다. 이런 세 가지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들은 출발 전 몇 주간 직접 지뢰 보호의 세트를 입고 작업을 하고 짐을 운반해보니까 바보같은 거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호의는 차고 평지만 다녀도 진이 빠지게 했고, 그 상태로 경사가 심한 산 비탈에서 지뢰까지 찾아야 한다니... 굳이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아도 몹시 힘든 일이라는 걸 알만 했다. 총 몇 kg인지 기억은 안 나는데 TV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 나온 적 있으니 나중에 정확한 무게를 알아봐야겠다. 보호의 세트엔 지뢰 전투화와 덧신이 있는데, 덧신까지 신으면 굽이 너무 높아서 (여자들 힐 신은 것보다 훨씬 높다) 잘못 걷다가 발목이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에 낭심 보호구는 땀이 많이 차고 다니는데 불편하게 했고, 다른 보호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대강 이런 식이다... 출처(대한민국 육군 flickr)

CC BY-SA 2.0





  전날인 목요일에 차량에 짐을 몽땅 실었다. (전날 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여러 날에 걸쳐 필요한 장비, 물자를 준비하고, 운반하고 했었다. 전날 실은 건 말 준비해온 '모든' 물자를 실은 거였다) 그리고 출발하는 금요일 아침이 되자 일찍 일어나서 남아있는 짐들(옷가방, 개인물품, 세면도구)을 또 차량에 싣고 출발했다. 인제에서 양구까지, 양구에서 가칠봉 OP를 담당하는 부대까지 오랜 시간동안 차를 타고 이동했다. 해당 부대에 내려서 두돈반 트럭의 짐을 4/5톤 트럭에 옮겨 실었다. 경사가 가팔라서인지 이유는 모르지만 두돈반이 OP까지 올라가지 못한다고 해서였다.
 
  짐을 옮기고 걸어서, 부대로부터 OP로 가는 길의 통문을 통과했다. 통문의 보병들은 보니까 신기했다. 우리는 공병이라 개인화기가 다 똑같이 소총 한 정이지만, 보병들은 망원경 달린 총도 있고, 유탄 발사기 달린 총도 있었기 때문이다. 방탄 헬멧도 약간 다르고 야투경 장착하는 장비가 달린 경우도 있었다. 우리에겐 없는 전투조끼도 입고 있었다.

  통문 통과 후 병력 승차 지점에서 4/5톤 트럭을 기다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마치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DMZ 도착 전인데 왠지 긴장됐고 주위가 전부 안개로 둘러싸여 있고 키 작은 나무 여러 종류가 많이 있었다. 숲속에 누가 숨어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 차 타고 가칠봉 OP에 도착했다. 짐을 전부 내리고 작전 물자, 숙영 물자로 분류했다.

마치 제주도 한라산 중턱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 사진은 한라산 사진이다; 근데 딱 저렇게 생김 (CC0 Public Domain) 


  지형은 굳이 따로 운동을 안 하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기만 해도 운동이 될 것같은 가파른 경사지형이었다. 경사때문에 짐 나르는 게 많이 힘들었다. 점심은 전투식량으로 때웠다. 점심을 먹고 주위를 둘러보니까 가칠봉 뒤편의 해안마을의 잘 정리된 경작지 풍경이 몹시 좋았다. 펀치볼 지형이라 둘레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그 가장자리 산 위가 거의 다 구름으로 덮여 있어서 문명(게임)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칠봉에서  남쪽을 보면 이런 풍경이 연상된다... (출처: http://squmaq.blogspot.kr/2014/08/blog-post_24.html )


  날씨가 신기하게 몇 시간 단위로 바뀌었다. 쨍쨍하게 맑다가 갑자기 구름끼고 찬 바람 불었다가 안개 꼈다가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바뀐다.

  점심 식사 이후 생활관을 만들기(?) 전에 잠시 쉬는 동안 백두산 부대 관측장교님의 지형, 주변 초소 설명을 들었다. 눈으로 보이는 지역에 북한군 초소와 북한군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나라가 분단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켜줬다. 망원경으로 북한 초소와 북한군이 내 놓은 길을 보면서 혹시나 누군가 돌아다니지 않을까 했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초소에 들어가서 자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들도 여길 쳐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북한이 이미 망해서 국경에 아무도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관측장교님이 하는 브리핑이 너무 절도있고 또박또박해서 멋있었다. 우리도 간혹 임무 브리핑 할 기회가 있는데 병사들이 외워서 더듬더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군대 일기 목차

댓글 없음:

댓글 쓰기